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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무예도보통지서(御製武藝圖譜通志序)
관리자  2008-03-14 00:20:20, 조회 : 1,120
- 첨부파일 #1 : 무예도보통지_서.jpg (171.3 KB), Download : 81


우리나라 군사조련(軍士操練)의 제도는 삼군(三軍)은 교외(郊外)에서 조련하고 위사(衛士)는 금원(禁苑)에서 조련하였는데, 그 금원에서의 군사 조련은 세조(世祖,光廟朝) 때부터 성행하였으나 궁시(弓矢) 하나의 기예(技藝)에 그쳤을 뿐 창검(槍劍)과 같은 여러 기예는 대개 들어보지 못하였다.


선조(宣祖)께서 이미 왜구(倭寇)를 평정(平征)하시고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구득(購得)하여 보신 후에 훈국랑(訓局郞) 한교(韓嶠)를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사들에게 파견하여서 두루 질정(質正)하여서 곤봉(棍棒) 등 6기(六技)를 궁구하게 해득하여 도보(圖譜)를 만들게 하였고 효종(孝宗) 때에는 전대(前代)의 공적(功績)을 밝게 이어받아 내열(內閱)을 자주 행하였다.

어떠한 수법(手法)과 기예(技藝)가 더욱 크게 나아져서 격자지법(擊刺之法)이 천명(闡明)되어지자 단련(團練)의 범위가 조금 넓어졌다.
그러나 6기(六技)일 뿐으로 그 종목(種目)이 더하여진 것은 아니었다.

영조(英祖) 기사년(己巳年: 영조 25년, 1749)에 왕세자(小朝, 사도세자)께서 서무(庶務)를 섭정(攝政)하실 때 죽장창(竹長槍) 등 12기(十二技)를 더하여 도보(圖譜)를 만들어서 6기와 함께 통관(通貫)하여 강습(講習)한 일이 있었다. 현륭원(顯隆園)의 뜻(志)으로서 십팔기(十八技)의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짐은 무의식(武儀式)과 전형(典刑)을 이어가도록 힘쓰고 또 기예(騎藝) 등(等) 6기(六技)를 다시 더하여 24기(二十四技)로 하였으며, 이미 명(命)을 받고 고거(考据)하여 효습(曉習)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나 된다.

원속(原續)의 도보를 모아서 합하여(拓合) 의(義),예(例),전(箋)을 바로잡아서 묶고(賞括) 그 원류(源流)를 해석(解釋)하여 제도(制度)에서 품평(品評)하여 정(定)하고, 명물(名物)로 하여금 예술의 묘용(妙用)으로서 한 권의 책을 펴내서 관령(管領)으로서 그 책 이름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 하였다.


대개 격자지법(擊刺之法)이 더욱더 증보(增補)되고 더욱더 상세(詳細)해졌을 뿐만 아니라 금원에서 군사를 조련하는 진전(眞詮)이 이때에 이르러서 나왔다. 오위(五衛)의 진(陣)을 행하는 『병장도설(兵將圖說)』과 더불어 교외에서 군사를 조련하는 지남자(指南者)로, 서로 씨와 날(經緯)의 좋은 짝이 되어 모두 전(傳)하니 강성(强盛)하다 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짐이 일찍이 먼저 행진(行陣)을 말하고 뒤에 기예를 말한 것은 병가(兵家)에서 흔히 하는 말이나 병가의 오교(五敎)에서 기예조련(技藝操練)을 두 번째로 하고 진법조련(陣法操練)을 세 번째로 하니 어째서인가?


대저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運行)을 밝히고 형덕(形德)의 기이하고 이상한(奇谿) 운수(運數)를 살펴서 그치기를 담장과 같이 하고 움직이기를 바람과 비처럼 하는 것은 이 진법(陣法)의 좋은 점이다. 그러나 그 안으로 부딪치고 밖으로 공격하는 도구(道具)는 부득불 수(手),족(足),기계(器械)로써 바탕을 삼아서 진을 펴는데 무적(無敵)인 것은 오로지 격자(擊刺)의 편첩(便捷)에 달려 있으니 군사(軍事)를 논(論)하는 순서가 어찌 오로지 그러하지 않겠는가? 진실로 횟수를 거듭하여 이 책의 법식을 시행(施行)하여서 중앙을 지키는 위사(衛士)와 재목이 되는 무관(武官)이 날로 용호지도(龍虎之韜)를 익히고 활시위를 길게 당기고 쇠뇌를 메기는(引關蹶張) 것은 모두 국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비휴(皮貅)처럼 빠른 용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찬술(繼述)하고 작성(作成)하는 본뜻은 곧 만 억년이 지나도록 가르침을 닦고 깨우침을 밝히는(修敎明諭) 진실이 변함없이 역시 곧 이에 있음이니 힘쓰노라.

짐(正祖)이 즉위(卽位)한 지 14년, 경술년(庚戌年)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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